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사보이아 가문 (문단 편집) === 수난사(16~17세기) === 프랑스-이탈리아-오스트리아-스위스의 경계에 위치한 입지를 살려 사보이아 공국은 여러 세력들을 중재하며 실리를 추구하려 했지만 프랑스의 이탈리아 침공 최단 경로에 위치했기 때문에 프랑스의 압력에서 자유롭지 못했다. 더군다나 아메데오 8세의 아들 [[루도비코(사보이아)|루도비코]] 사후 즉위한 맏아들 [[아메데오 9세]]는 종교에 헌신한 나머지 정치적으로는 무능하여 부인 프랑스의 욜랑드(Yolande de France)로 인해 프랑스의 간섭을 불러일으켰고, 아메데오 9세의 뒤를 이은 [[필리베르토 1세]], [[카를로 1세]], [[카를로 조반니 아메데오]]가 모두 어린 나이에 죽으면서 정치적으로 혼란에 빠졌다. 결국 카를로 조반니 아메데오의 종조부이자 아메데오 9세의 동생 [[필리포 2세]]가 사보이아 공작으로 즉위하였으나 그는 전임자의 가장 가까운 혈연이었을 뿐, 법적 계승자는 아니어서 사보이아 공국의 통치권을 두고 여러 세력의 도전에 직면하였다. 16세기에도 계승 정통성 문제로 정치적인 혼란이 계속되는 와중에 1536년, [[밀라노 공국]]을 완전히 지배하기 위하여 사보이아 공국을 [[밀라노]] 침공의 교두보로 삼으려던 [[프랑스 국왕]] [[프랑수아 1세]][* 프랑수아 1세의 어머니 [[사보이아의 루이사]]는 필리포 2세가 첫번째 부인 부르봉의 마르그리트로부터 얻은 장녀였다.]의 침략을 받았다. 당시 공작이었던 [[카를로 2세]]는 영토 대부분을 잃은채 [[베르첼리]](Vercelli)에서 사망하였고, 사보이아 공국은 프랑스에서 파견된 행정관들의 간접 통치를 받게 되었다. 카를로 2세의 유일한 자식인 [[에마누엘레 필리베르토]]는 프랑스에게 점령당한 사보이아 공국을 되찾기 위해 이모부인 신성 로마 제국 황제 [[카를 5세]][* 에마누엘레 필리베르토의 어머니 포르투갈의 베아트리즈(Beatriz de Portugal)는 카를 5세의 황후인 [[포르투갈의 이자벨]](Isabel de Portugal)의 동생이었다.]와 사촌인 스페인 왕 [[펠리페 2세]] 휘하에서 [[스페인령 네덜란드]] 총독으로 복무하면서 기회를 엿보던 중 1557년 생캉탱 전투에서 프랑스군을 상대로 직접 스페인군을 이끌고 승리하였고 1559년 체결된 카토캉브레지 조약으로 사보이아 공국을 되찾을 수 있었다. 공국을 되찾은 에마누엘레 필리베르토는 공국의 언어를 [[라틴어]]에서 [[이탈리아어]]로 대체하였고[* 더 정확히는 발레다오스타와 알프스 동쪽의 사부아에서는 프랑스어를, 알프스 동쪽의 피에몬테와 니차에서는 이탈리아어를 공용어로 지정한다는 칙령이었는데 이후 사부아의 샹베리에서 피에몬테의 토리노로 천도하면서 이탈리아어가 자연스럽게 프랑스어를 누르고 우세를 점하게 되었다.], 프랑스의 침략으로부터 노출된 샹베리에서 [[알프스 산맥]] 뒤편에 있어 상대적으로 안전한 [[토리노]]로 [[천도]]하면서 프랑스와 이탈리아 사이의 애매한 정체성을 가졌던 사보이아 공국을 확실한 [[이탈리아/문화|이탈리아 정체성]]을 가진 국가로 발돋움시켰다. 에마누엘레 필리베르토의 후계자 [[카를로 에마누엘레 1세]]는 [[살루초]](Saluzzo)를 병합하여 [[피에몬테]] 지역 대부분을 사보이아 공국의 영토로 편입시켰지만 그 과정에서 프랑스의 동의를 얻기 위해 1601년 [[리옹]] 조약으로 브레스, 뷔제, 젝스 지역[* 현재 [[프랑스]] [[앵(프랑스)|앵 데파르트망]].]을 양도하였다. 이후 [[부르봉 왕조|프랑스 부르봉 왕조]]와 [[압스부르고 왕조|스페인 압스부르고 왕조]] 사이에서 줄타기를 하며 살아남았지만 [[비토리오 아메데오 1세]]와 결혼한 프랑스 국왕 [[앙리 4세]]의 딸 [[크리스틴 마리]]가 남편 비토리오 아메데오 1세와 맏아들 [[프란체스코 자친토]]가 연달아 사망하면서 어린 둘째 아들 [[카를로 에마누엘레 2세]]의 섭정을 맡게 되자 비토리오 아메데오 1세의 동생이었던 마우리치오와 토마소 프란체스코[* Tommaso Francesco di Savoia 1596~1656. 사보이아 가문의 본가의 대가 끊긴 후 뒤를 이은 사보이아-카리냐노 분가의 시조이다.]가 크리스틴 마리 공비 때문에 프랑스의 영향력이 강해질 것을 우려하여 1638년 피에몬테 내전을 일으키며 내부적으로 분란에 휩싸였다. 프랑스의 [[리슐리외 추기경|]]까지 개입한 이 내전은 1642년에야 종결되었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